오늘은 좀 바쁜 화요일입니다. 얼른 들어가 보시죠. 딥다이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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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시의 모습. 아일랜드는 1인당 GDP 기준으로 세계 2위인 나라이지만, 그 수치가 진짜 경제 기적이냐 통계의 마법일 뿐이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게티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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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의 나라, 역사 속 대기근의 나라.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유럽의 아일랜드입니다. 그런데 영국 옆 섬나라 아일랜드가 지금은 1인당 GDP 10만 달러가 넘는 세계 두 번째 부자나라인 건 아시나요? 요즘 침체에 빠진 유럽 경제를 떠받치는 가장 잘나가는 부국인데요.
1990년대 초까진 서유럽에선 가난한 축에 속했던 나라, 금융위기 직후 그리스와 함께 굴욕적인 구제금융을 받았던 나라는 어쩌다 돈이 넘쳐서 고민(?)이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게 됐을까요. 오늘은 아일랜드 경제의 마법을 들여다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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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얼마 전 6월 5일 아일랜드 중앙통계청이 발표한 1분기 GDP 성장률(전 분기 대비)입니다. 석 달 만에 한 나라 경제가 10% 가까이 커지다니.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일이죠. 중앙통계청 관계자조차 “GDP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며 깜짝 놀랐을 정도인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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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중앙통계청이 발표한 1분기 GDP 성장률 자료. GDP는 전 분기보다 9.7% 증가했지만, 함께 공개한 수정 국내 수요(MDD)는 0.8% 성장에 그쳤다. GDP 통계가 실제 국내 시장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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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 성장의 원동력은 제약 수출. 아일랜드에 공장을 둔 글로벌 제약사들이 관세 인상에 앞서 3월 미국 수출을 243%나 늘렸습니다. 화이자·로슈·머크·애브비·바이엘·존슨앤드존슨 등. 유명 제약사들이 모두 아일랜드에 사업장을 두고 있죠. 예를 들어 화이자의 대표상품 비아그라는 미국 연구소에서 개발됐지만, 그 생산은 대부분 아일랜드 코크주의 작은 마을에서 이뤄집니다. (한때 그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를 흡입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그럼, 아일랜드 경제가 잘 나가는 게 다 제약 공장 덕분이냐. 아니, 그 못지않게 큰 산업이 있습니다. 바로 IT 대기업이죠. 바로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메타, 구글 같은 기업입니다.
왜 미국 빅테크 이름이 나오냐고요? 이들 기업이 아일랜드에 세운 자회사는 해마다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빅테크의 막대한 지식재산권 소유권을 쥐고 있는 게 바로 이 자회사들이기 때문이죠. 미국 본사가 무형자산인 지식재산권 중 상당 부분을 아일랜드 자회사로 넘긴 겁니다.
한국 또는 중국에서 아이폰이 한 대 팔릴 때마다 지식재산권(애플 로고, ‘아이폰’이란 이름과 로고 등) 사용료가 아일랜드 자회사로 흘러간다고 보면 됩니다. 아일랜드는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떼돈을 버는 구조이죠. 이게 다 아일랜드 국내총생산(GDP)으로 잡힙니다. 아일랜드 전체 법인세 수입의 약 43%를 단 3개의 미국 기업-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화이자가 차지할 정도입니다.
아일랜드가 왜 세계적인 부국인지 아시겠죠. 국제통화기금(IMF)의 2025년 통계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1인당 GDP(10만8919달러)는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스위스·싱가포르·아이슬란드·노르웨이 같은 부자 나라를 제친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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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자료에 따르면 아일랜드 1인당 GDP는 2019년부터 줄곧 스위스와 2, 3위를 다투고 있다. 참고로 한국은 36위. 1인당 GDP는 발표하는 기관마다 조금씩 수치와 순위가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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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아일랜드 경제는 암울했습니다. 산업화는 더뎠고 여전히 농업 비중이 컸고요. 실업률은 치솟아 18%에 달했고, 연간 4만명 넘는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나라를 떠났죠. 1인당 GDP는 남유럽 국가들(스페인, 그리스 등)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자원도 없고, 돈도 부족하고, 인구도 적은 이 나라가 믿을 건 해외기업 유치뿐. 오래전부터 아일랜드는 이를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1960~70년대에 이 나라는 수출이 주력인 다국적 기업에 대한 법인세율을 0%로 확 깎아줬고요. 1980년대에도 제조업체엔 표준 세율보다 훨씬 낮은 10%의 특별세율을 적용했죠. 이 시절 새로 유치한 외국 제조기업엔 10년간 세금 전액 감면이란 파격 혜택을 제공해 줬는데, 1980년 아일랜드에 진출한 애플이 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아일랜드 경제의 전환점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 냉전이 끝나고 동유럽 시장이 열리자, 미국 기업들이 유럽 공략을 위해 앞다퉈 법인을 세웠는데요. 다들 폴란드나 체코, 동독이 유럽 진출의 거점으로 떠오를 걸로 예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미국 기업들은 유럽 끄트머리 아일랜드로 몰려들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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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구글 유럽 본부의 모습. 구글은 2004년 이 곳에 유럽 본부를 설치했다. 게티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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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리적 이점이 없어 보이는 대서양 섬나라 아일랜드였을까요. ①낮은 법인세율 ②높은 교육 수준 ③영국보다 낮은 임금 등이 매력 포인트였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미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운 영어 사용 국가란 점이었습니다.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 아시죠. 그때 굶주림에서 벗어나려 미국으로 떠난 아일랜드인만 200만명에 달합니다. 미국인의 9.5%(약 3150만명)가 아일랜드계 혈통(독일 다음 2위)이란 조사 결과가 있는데요.
미국 기업의 미국인 관리자들은 유럽 중에서도 자신들이 편안하게 여긴 아일랜드를 근거지로 선택하게 됩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라 의사소통도 편하고요. 동유럽 국가처럼 정부가 기업활동에 개입하지 않는 기업 친화적 나라이죠. 아일랜드는 단숨에 다국적 기업 투자의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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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아일랜드 경제의 눈부신 질주가 시작됩니다. 1995~200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 9.4%. 전 세계가 ‘경제 기적’이라며 찬탄합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유럽의 가난한 나라가 부유한 나라로 신세가 뒤바뀌었죠. 이전엔 서방 국가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일랜드엔 ‘켈트 호랑이(Celtic Tiger)’라는 멋진 별명이 붙었습니다. 당시 주목받던 ‘아시아의 네마리 용’(홍콩·싱가포르·한국·대만)과 성장세가 맞먹는단 의미였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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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2024년 아일랜드의 실업률. 1990년대 초반까지도 15%였던 실업률은 이후 경제성장과 건설업 호황으로 급격히 낮아졌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충격이 다시 찾아온다. 매크로트렌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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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고속질주는 1999년 유로화에 가입하면서 더 탄력을 받았습니다. 아일랜드는 이전보다 한층 싼 금리로 금융시장에서 돈을 조달할 수 있게 됐죠. 1990년대 초 10%가 넘었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5% 아래로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2000년대, 거품이 끓어오릅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은행에 대한 규제가 매우 느슨했던 상황. 생애 첫 주택 구매자는 집값의 100%까지 대출받을 수 있었죠. 집값은 자고 나면 뛰었고, 모두가 빚내서 집을 사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전 국민이 빚에 중독된 것만 같은 광풍이 일어났죠. 1996~2006년 아일랜드 평균 주택 가격은 무려 330% 상승합니다(중고 주택 기준). 더블린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 시장이 됐죠.
건설업은 대호황. 짓는 족족 팔리니 건설사는 주택을 마구 지어댑니다. 2005년 아일랜드에선 연간 8만채의 신규 주택이 지어졌는데요. 인구수로 10배가 훨씬 넘는 영국의 공급량이 16만채였으니 분명 과잉 공급이었습니다. 하지만 빚으로 떠받친 수요 덕분에 주택 가격은 계속 오르기만 했죠. 건설업 호황 덕분에 아일랜드 실업률은 뚝 떨어집니다. 이 시기 경제를 이끈 건 단연 부동산이었죠.
모든 것이 절정에 달했던 그 순간. 우리 모두 아는 그 일이 일어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아일랜드 부동산 거품이 펑 터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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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시의 모습. 더블린의 상징 건축물 스피어가 보인다. 2003년 완공된 스피어는 아일랜드의 '켈트 호랑이' 호황기에 지어졌다. 게티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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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시장은 순식간에 무너졌고요(2007~2012년 평균 주택가격 53% 하락). 주택담보대출이 줄줄이 연체됩니다. 대출을 받아낼 길 없게 된 은행들이 휘청거렸고요. 뱅크런을 막기 위해 아일랜드 정부가 개입해 은행 예금과 부채에 대한 전면 보증을 선언했죠. 그리고 그게 결정적인 실책이었습니다. 보증으로 엮인 정부까지 결국 금융위기 소용돌이에 휘말린 거죠.
호황기 아일랜드는 재정적으로 매우 건전한 국가 신용등급 AAA의 모범 국가였습니다. 그 재정의 큰 축은 부동산 양도소득세였고요. 부동산 관련 세수가 급증했던 시절, 아일랜드 정부는 소득세를 내리고 공공지출을 대폭 늘려놨습니다. 그런데 금융위기로 모든 게 무너졌고 재정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국가 신용등급이 뚝뚝 떨어졌죠.
2010년 말, 결국 아일랜드는 IMF·EU와 85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에 합의합니다. 그리스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였죠. ‘켈트 호랑이가 도도새의 길을 가고 있다’는 평이 나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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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5년, 아일랜드가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그해 GDP 성장률은 무려 26.3%.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놀라서 들여다본 전문가들의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아일랜드가 일종의 조세 피난처가 됐잖아?
아일랜드는 1990년대 EU의 압력으로 일부 기업에 대한 10% 특별세율 제도를 없애야 했는데요. 그 대신 모든 기업에 적용하는 표준 법인세율 자체를 2003년 12.5%로 확 끌어내렸죠. 동시에 다국적 기업엔 세금을 더 줄일 수 있는 통로도 열어줬습니다. 아일랜드에 2개의 자회사를 등록한 뒤(A와 B), 그중 하나(B)를 버뮤다 같은 조세피난처 두면 A에서 B로 이전하는 소득엔 세금을 물리지 않는 식이었죠. ‘더블 아이리시(Double Irish)’ 제도였습니다.
구제금융 체제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2010년 말~2014년 초, 아일랜드 정부는 온갖 세금을 인상했습니다. 담뱃세, 주류세, 자동차 등록세, 탄소세, 그리고 출산휴가 수당 세금까지. 2013년 한 해에만 가구당 세금이 1000유로 늘었을 정도였죠. 하지만 이 고난의 행군 기간에도 법인세율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아일랜드가 구제금융을 졸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해외 기업 투자가 몰려왔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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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항공기 리스회사 에어캡 본사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다. 에어캡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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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세계 최대 항공기 임대기업 에어캡(AerCap)은 2014년 모든 항공기 소재지를 아일랜드로 이전했습니다. 그 항공기들은 실제론 세계 각지에 임대됐기 때문에, 아일랜드에 한 번도 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요.
2015년의 그 엄청난 성장률은 애플 덕분이었습니다. 애플은 2015년 아일랜드 자회사와 계약을 맺고 애플의 특허·상표·브랜드 등 지적재산을 미주 이외 지역에서 이용할 권리를 통째로 넘겼죠.
이런 식으로 임대 항공기에 대한 권리, 각종 지식 재산권 같은 다국적 기업의 무형자산이 아일랜드로 몰립니다. 통계상으론 분명 GDP(국내총생산)에 크게 기여하지만 실제 아일랜드에서 눈에 보이는 활동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돈이 회계적으로 아일랜드를 스쳐 지나갈 뿐, 실제 아일랜드의 소득과 소비 증대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레프러콘 경제학(Leprechaun economics)’.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무지개 끝에 금항아리를 둔 아일랜드 신화 속 심술궂은 요정 레프러콘 이름을 따왔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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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애플이 과거(1991~2007년) 아일랜드의 불법적 세금 감면 특혜로 인해 체납한 세금 130억 유로(이자 포함 141억 유로)를 아일랜드 정부에 내야 한다는 최종 판결이었죠.
2016년 유럽위원회가 내렸던 결정이 옳았다고 재판소가 손 들어준 건데요. 불법 아니었다고, 체납세금 안 받겠다고 애플과 같은 편에 섰던 아일랜드가 8년의 소송 끝에 패소하게 됐죠. 패소로 141억 유로를 일시금으로 받은 아일랜드는 울어야 할까요, 웃어야 할까요. 정부가 원치 않았던 이 횡재를 두고, 한동안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 돈을 축구협회에 달라’며 아우성이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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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코크주에 있는 애플의 유럽 본부. 애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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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압박으로 그동안 아일랜드 세금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기업 법인세율은 2024년부터 15%로 상향됐고요. 조세회피 수단이던 ‘더블 아이리쉬’ 제도는 완전히 사라졌죠.
그래도 여전히 아일랜드는 세제 혜택 많고 기업하기에 좋은 나라로 꼽힙니다. 법인세율은 낮지만 다국적 기업이 거두는 이익이 워낙 많다 보니 세수는 늘 풍족합니다. 정부 재정은 3년 연속 흑자. 지난해엔 애플 사건까지 겹치면서 무려 250억 유로(35조원) 흑자를 기록했죠. 다시 풍요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습니다. 아일랜드를 질투하는 다른 나라의 견제가 만만찮기 때문이죠. 특히 가장 큰 변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일랜드가 미국 제약산업을 장악했다”고 불평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거대 제약사에 공장 이전을 직접적으로 압박한다면? 미국이 이미 관세 부과를 예고한 상황에서 일부 공장은 아일랜드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또는 만약 트럼프 대선공약대로 미국이 법인세율을 21%에서 15%로 인하한다면? 아일랜드는 투자처로서의 가장 큰 장점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요란한 롤러코스터를 탔던 아일랜드 경제는 지금의 상승궤도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설화 속 레프러콘 요정처럼 GDP 대박의 행운도 어느 한순간 자취를 감춰버리게 될까요. 인구 530만명의 섬나라, 아일랜드 이야기가 관심 끄는 이유입니다. By.딥다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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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지 않게 쓰고 싶었는데, 워낙 방대한 얘기라서 도무지 줄일 수가 없네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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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 때문에 더블린 풍경 사진을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잠시 즐거웠네요.
더블린 리피 강변에서 기네스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며.
저는 금요일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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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한애란
재미있거나 유익하거나.
읽을 만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23년차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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